기자로만 20여 년 동안 일해온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커리어 우먼’이란 말이다.
단어 그대로 일을 가진 여자란 의미 이외에, 우리 사회에서 커리어 우먼은 한마디로 잘
나가는 여자 또는 출세한 전문직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이라고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여자의 힘들었을, 그리고 현재도 분명히 힘들 직업적 생존 과정을 거두절미하고 이른바
커리어 우먼이란 단어가 풍기는 달콤한 환상을 부추기는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게 사실이다.
다이앤 키튼 주연의 1987년 작 <베이비
붐>은 일하는 주부라면 누구나 느끼는 육아와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코믹하면서도
비교적 현실감 있게 다룬 작품이다. 월가의 비즈니스 우먼이자 독신인 주인공
JC 와이어트는 이른바 ‘수퍼여피족’으로, ‘타이거 레이디’란 별명처럼 일할
때는 인정사정 없이 밀어붙이는 완벽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한 친척으로부터
‘아기’를 소포로 받고는 인생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는다. 아기의
유일한 친척이 자신뿐이란 것을 알게 된 JC는 아기를 맡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모든 생활은 엉망진창이 돼버린다. 결국,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는 치욕스런
상황을 겪게 된 JC는 시골마을로 이주해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과장과
지나친 단순화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직장과 아이 사이에서 늘 마음졸이며 살아가는
주부 직장인들의 어려움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공들을 땅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공중으로 던져 올려야 하는 저글러처럼, 직장과
아이 또는 가정 둘 다 놓칠 수 없는 주부 직장인들로서는 공감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JC가 우연히 만든 사과소스 이유식으로 대박을 터트려
또다시 성공한다는 결말은 지극히 할리우드적이지만.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성을 다룬 영화로는, 단연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를 꼽고 싶다. <빵과 장미>는 ‘꿈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한 첨단 빌딩에서 일하는 이민자 청소부들의 노조결성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감독은 1990년 로스앤젤레스 청소원 노조결성운동이란
실제 사건과 주인공 마야를 중심으로 한 허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섞어 놓고 있다.
미국으로 먼저 이민 온 언니와 함께 청소부로 살아가던 마야는 우연히
지식인 운동가인 샘(에드리안 브로디)을 통해 자신들이 고용주에 의해
터무니없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빵’이 필요하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장미’도 원한다. “아무도
장미를 거저 주지 않는다. 장미를 얻기 위해선 구걸을 멈추고 단결해야 한다”고
마야는 외친다.
노조결성운동을 하면서 마야와 샘은 애틋한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강제퇴직 당해
대학 장학금까지 놓치게 된 동료를 위해 마야가 상점에서 돈을 훔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지게 된다. 고용주와의 투쟁에서 성공하고도 버스에 실려 강제 추방당하는
마야와 동생을 향해 뛰어가면서 울며 손을 흔드는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잔영을 남긴다. 노조 활동 경험이 있는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인생에서 진정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가슴 아픈 수작이다.
